[위령] 위령성월 특집: 죽음, 영원한 삶을 향한 시작

관리자
2017-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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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성월 특집] 죽음, 영원한 삶을 향한 시작


오늘을 사랑으로 살며 하느님 나라를 희망한다

 

 

- 대구대교구청 성직자 묘지 문.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라는 뜻의 라틴어가 붙어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위령성월이다. 교회는 매년 11월을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기도하는 위령성월로 지낸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생각하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해 묵상하게 된다. 죽음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될까? 우리에게 죽음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요, 영원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문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죽음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거나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위령성월을 맞아 관련된 교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모든 성인의 통공과 연옥 교리

 

11월의 첫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다. 이날 교회는 전례력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성인을 기린다. 바로 다음 날인 2일은 ‘위령의 날’이다. 이날에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한 위령미사를 봉헌한다. 

 

교회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모든 성인의 통공 교리’와 ‘연옥 교리’에 기인한다. ‘연옥’은 죽은 이들이 지은 죄로 인해 남아있는 잠벌에 대한 보속을 치르는 곳이다. 지상에서 거룩하게 살다 간 성인은 죽음과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서 끝없는 행복을 누리지만, 죄에 따른 잠벌이 남아있는 이들은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통공 교리’는 천상의 성인들과 지상의 우리, 그리고 연옥의 영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회를 이루며 기도를 통해 서로의 공을 나누고 영적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모든 성인 대축일 다음에 위령의 날이 이어지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두 가지 교리를 근거로 우리는 영혼들을 위한 미사와 기도, 선행 등을 통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열심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연옥에 있는 이들에게만 양도할 수 있는 전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죽음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될까?

 

교리에 따르면, 우리는 죽은 뒤 개별 심판(사심판)에 따라 세 가지 상황 중 하나에 처한다. 바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이다. 천국과 지옥, 연옥은 장소라기보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따른 ‘상태’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천국은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며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상태다. 반면 지옥은 죽을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거부해 영원한 벌을 받는 상태,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연옥은 하느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지만 완전히 정화되지 않아(죄를 용서받더라도 그에 따른 잠벌은 남아있기 때문에) 보속을 치르는 상태다. 

 

세상의 종말, 곧 하느님 나라가 오면 선한 이나 악한 이, 살아있는 이나 죽은 이 모두 최후의 심판(공심판)을 받는다. 의인들은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지만 악인은 단죄를 받게 된다. 이때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실천’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의인(義人)과 악인(惡人)으로 구분된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마태 25,31-46 참조)

 

다만 종말이 언제 이뤄질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충실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괜히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

 

교회는 죽음이 그것으로 끝이 아님을 잘 알기에, 그만큼 세상을 떠난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특히 위령성월에 연옥 영혼들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지만, 사실 교회는 위령성월뿐만 아니라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한다. 성찬의 전례에 집중해 봤다면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감사기도 제2양식)라는 기도 내용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 식사 후 기도를 바칠 때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특별히 올해는 ‘자비의 희년’이자 병인순교 150주년을 함께 지내고 있어 더 의미가 깊다.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자비를 실천하고, 순교자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신앙인으로서 죽음의 의미에 대해 묵상하기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개막한 자비의 희년은 올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인 11월 20일 폐막을 앞두고 있다. 각 교구마다 자비의 희년 순례지를 지정하고, 전대사 지침을 발표함으로써 더욱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참고로 희년 전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순례지 방문과 함께 고해성사와 영성체, 자비에 대한 묵상이 중요하다. 이와 더불어 신앙고백(사도신경과 주님의 기도)을 하고, 교황의 뜻에 따라 기도하고 자비로운 행동 한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 

 

자비의 희년이 끝나기 전에 가까운 순례지를 방문하고 전대사를 청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기도가 연옥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빛이 되어 줄 것이며, 또한 언젠가 우리가 받아야 할 그 기도가 훗날 우리에게 빛을 밝혀 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에서 희망을 찾는 삶

 

죽음은 분명 슬픈 일이고,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부활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마냥 슬퍼하거나 두려워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위령미사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위령감사송 1)

 

따라서 우리는 오히려 적극적인 자세로 죽음을 준비하고,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힘껏 도와야 한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죽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그 너머에 있는 영원한 희망을 바라본다. 그 희망을 위해 우리는 오늘의 삶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며 자신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보게 된다. ‘죽음’에 대한 묵상은 결국 ‘삶’에 대한 묵상이요,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 곧 삶을 잘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자. 위령성월을 맞아 죽음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면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기도에 정성을 보태야겠다.

 

[가톨릭신문, 2016년 11월 6일, 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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