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주일 가해

윤종국 마르꼬 신부
20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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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 50,4-7; 필리 2,6-11; 마태 27,11-54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수난을 기념하는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시려고 예루살렘에 공개적으로 입성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으실 줄 이미 아셨던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사두가이와 백성의 원로들, 곧 당시 이스라엘의 기득권층은 예수님의 회개운동을 정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회개 운동이 내적인 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종교 제도, 사회 구조의 변화까지 촉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판단했고,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제일 먼저 눈치 챈 인물이 유다였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자신만이라도 위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예수님과 자신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밝히기 위해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아마 비밀장소였을 것입니다.)을 예수님을 잡으려는 자들에게 알립니다.

그렇게 잡히신 예수님은 ‘법’의 이름으로 처단되었습니다. 흔히 소크라테스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아테네 정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독약을 먹으면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이 말도 진짜 소크라테스의 말인지 의심스럽다고 하지만, 이 말은 때로 악법의 존재를 합리화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최고의 법은 최대의 불의”라는 격언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법은 최소한의 규약이기 때문에 그 안에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법조항만을 글자 그대로 적용하려다 보면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거나, 가해자는 보호를 받는데, 피해자는 방치되는 등의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독일의 정치가도 법을 제정해서 법의 이름으로 유대인들을 합법적으로 학살하였습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도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만든 법을 통해 우리 민족의 재산과 토지를 수탈했고, 그 이후 군사독재시기가 끝나고 민주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국가폭력을 충분히 겪은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법의 이름'으로 처형되었다.

법은 특별한 악의가 없어도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사람을 괴롭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잡아들인 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합법적인 요건은 모두 갖추었습니다. 율법에 따라 증인 두 명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독성죄(성전을 헐어라)와 국가반역죄의 증거(내가 왕이다)도 준비해두었습니다. 물론 그 증언은 교묘하게 비튼 것과 거짓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론재판을 위해 군중들 가운데 선동가, 즉 바람잡이도 준비해놓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죽일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어떻게 해도 죽으실 것임을 알고 계셨고, 그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셨습니다.

그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처참하게 죽으셨고, 그 제자들도 스승과 같은 운명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범죄자로 비참하게 처형되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로 영원히 살아 계시지만, 자신들이 살기 위해 예수님을 죽인 자들은 시대를 초월한 악인들로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해치고,

내가 도망가기 위해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또 의로운 희생을 바치는 사람들을 범죄자로 몰지 않는지 성찰해야겠습니다.

오늘 수난복음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 우리 가자는 어디에 해당할지 성찰해야겠습니다.


나는 매사 자신의 이익을 앞세워 예수님을 배신하고 외면하는 유다와 같은 사람인가?

나는 예수님의 말씀이 못마땅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 같은 사람들인가?

나는 예수님을 죽이자고 소리치는 바람잡이인가?

나는 군중에게 휩쓸려 예수님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 사람인가?

아니면 잡히신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가 버린 제자들과 같은 사람인가?


성주간의 첫 날인 오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여정을 함께 걸으며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부활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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